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팔 전투 (문단 편집) == 개요 ==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4년 3월 15일부터 7월 1일까지 [[미얀마|버마]]와 [[인도]] 국경 지대에서 벌어진 전투. 명칭은 국경선 인도 측의 도시 [[임팔]]에서 유래했다. 보통 [[일본군]]의 작전 명칭 작명은 대부분 [[카타카나]] 글자만 하나 붙여서 ○호 작전이라고 한다. 따라서 일본군에서 붙인 작전명은 '[[우호 작전]](ウ号作戰)'이고 Battle of Imphal의 번역상 '임팔 전투'로 기재하는 게 정상이지만 [[한국]]에서는 이 둘을 섞어 '임팔 작전'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고, 드물게 '임펄 작전'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2013년 4월 9일 기준 [[구글]] 검색시 임팔 작전은 4390건, 임팔 전투는 2250건.][* 1970년대 연재된 소설 [[여명의 눈동자]]에서도 임팔 작전이라고 서술됐다.] 본 작전의 주목표는 임팔이었고, 코히마는 임팔 점령을 지원하기 위한 조공에 가까워서 임팔 전투라 부른 경우가 많지만, 코히마에서도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점에 주목해 '임팔-코히마 전투'라고 부르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https://www.nam.ac.uk/explore/battle-imphal|*]]] 작전의 준비기간이 긴 편이었으며, 또한 내부 준비만 다진게 아니라 그동안 [[영국군]]의 행군방향과 공격시기 등 여러 정보를 면밀히 포착해 허를 찌르는 기동전술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상당히 괜찮은 작전이었다.[* 실제로 작전 자체는 은근 맞아떨어져서 코히마를 지키던 영국군은 밀림을 뜷고 나온 일본군 2개 사단의 공세를 보고 당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물론 이 일본군은 '''너무 지나친 강행군'''으로 지쳐 도착만 했지 전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결국 코히마 주둔군의 반격에 처참하게 궤멸되고 패퇴해야했다.] 문제는 '''[[의도는 좋았다|탁상행정에서부터 이 한계가 벌써 드러났다는 것]]''' 임팔의 중요성과 영국군의 허를 찌르는 전략에 대해선 나름 정확했을지 모르나 '''그 외 모든 것'''이 부족했다. 전장에 도달하기 위한 경로, 그 동안의 보급, 포위 이후 적의 반격에 대한 대비나 만에 하나 작전 실패를 대비한 퇴로 확보등등이 모조리 갖춰지지 않아 반쪽짜리라 보기도 힘들 정도로 처참한 작전이었다. 이는 직전 일본군이 영국군에게 연전을 거두며 승승장구하던만큼 영국군을 지나치게 얕잡아보고 그들의 반격을 일체 고려하지 않은 것이 패전의 근본적인 원인이라 추정되고 있다. 후술할 '''일본인은 초식 동물이니 길가의 풀 뜯으며 전진하면 문제없다.'''는 희대의 망~~명~~언을 남긴 [[무타구치 렌야]]가 특히 유명하지만, 사실 이는 종합적으로 따져보면 일본군 내 파벌싸움과 정권 유지등의 이유로 '''같은 파벌이라는 이유 단 하나'''로 이딴 계획을 통과시킨 일본군 육군 수뇌부의 업보였다. 전쟁은 보급과 같은 전략단계를 도외시하고 단기결전으로 전세를 뒤집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그러한 방침은 무모한 도박이 될 수밖에 없는지 여실히 보여준 사례로 남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